“산들바람 일기 – 늦가을의 마당에서”
부제: 서리 맞은 고추와 국화의 고요함 속에서
아침 이슬이 마당의 풀잎 끝에 맺혀 있다.
밤새 내린 찬 공기 덕에 흙은 단단히 식었고,
밭머리에는 배추와 무가 겨울 채비를 마친 듯 가지런히 서 있다.
배추 잎 사이로 흙냄새가 은근히 올라오고,
무는 땅속에서 하얀 살을 살짝 드러내며
이 계절의 묵묵함을 닮아 있다.
한쪽 고랑에는 아직 서리맞은 고추가 몇 개 남아
붉은 빛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여름의 열기 속에 불타던 고추가
이젠 찬 바람을 견디며 계절의 끝을 지키고 있다.
그 옆의 토마토 넝쿨은 말라버렸지만,
햇살 한 조각만 닿아도 그 잔향이 향긋하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국화꽃이 남아 있다.
다른 꽃들은 이미 지고 없지만,
국화만은 고개를 곧게 들고
늦가을의 공기를 고상하게 품고 서 있다.
찬바람이 스쳐가도 한 송이도 허투루 흔들리지 않는다.
열매를 모두 떨군 나무들은
이제 가지마저 앙상해졌지만,
그 속엔 봄을 품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비워내는 이 고요함이
어쩌면 가장 풍요로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산들바람이 마당을 스쳐 지나간다.
바람 끝에 실려오는 흙냄새와 말라가는 잎사귀의 소리.
그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계절이 남기고 간 온기와 그리움을 한 움큼 품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