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과 식물-정원은 천천히 말한다”

봄은 아주 조용히,

먼 데서 발걸음을 옮겨 온다.

밤새 얼었던 흙이 풀리는 소리,

작게 하품하듯 싹 트는 꽃양귀비의 잎.

그 너머,

작약이 둥근 꿈을 품고

천천히 몸을 들어 올린다.

목단은 조금 더 의젓해

마당 한가운데 서서,

마치 오래전 이 집의 주인이었던 듯

기품을 내비친다.

라벤더는 바람의 결을 따라

보랏빛 향기를 조금씩 흘리며

정원의 윤곽을 그린다.

현관 가까이선 로즈마리가

낯선 이의 발걸음을 향기로 맞는다.


여름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햇빛이 정원에 눌러 앉는 날이 있다.

그때,

백일홍은 환하게 문을 열고

루드베키아는 강한 햇살을 들여 마신다.

금계국은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며,

“여름은 너무 무겁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말해주는 듯하다.

메리골드는 고운 손으로

밭과 꽃 사이를 잇는 길을 만든다.

벌과 나비는 그 길을 따라

정원 위를 지나는 노래가 된다.


가을은 말수가 적다.

낮은 음성으로, 길게 숨을 쉰다.

담장 아래로

구절초가 하얀 안개처럼 번지고,

정원 한가운데

국화가 천천히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

여름의 생기와 봄의 설렘이

조용히 내려앉는 자리.

그곳에서 정원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

해가 조금 기울면

꽃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가고

남겨진 자리에는

말 대신 여백이 자란다.


겨울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쉬는 것이다.

라벤더의 은빛 가지는

눈 내린 새벽에 더욱 선명하고,

로즈마리는 작은 초록으로

정원의 숨을 잇는다.

그 위에

낙엽과 볏짚이 이불처럼 덮이면

정원은 깊은 잠을 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곳은 끝이 아니라

다음 봄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는 것을.


정원은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은 서두르지 않고, 계절은 언제나 제 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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