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리 단풍 예찬
가을이 빚어낸 색의 향연, 물안계곡을 걷다
금요일 오후 7시쯤 시골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양이들을 불러 모아 사료를 챙겨 주고, 부랴부랴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바싹 마른 잔가지를 밑에 깔고 토치로 불을 붙이니 금세 불길이 살아난다. 처제네 부부가 사준 참나무 장작이 잘 말라 있어 불을 지피기가 한결 수월하다. 불이 자리를 잡고 나면 때에 맞추어 장작이나 작은 통나무를 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
습관처럼 한동안 비어 있던 방을 쓸고 닦는다. 그렇게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미리 틀어 놓았던 보일러의 온기가 어느새 차가웠던 방을 채워 준다. 아궁이의 불길이 안정되고 집안 정리가 끝나면 랜턴을 들고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쥐똥나무와 연산홍, 자산홍, 구절초를 살펴보고 감나무와 대추나무도 둘러본다. 김장을 위해 심어 놓은 배추가 잘 자라고 있는지도 확인한다.
이렇게 집 주변을 돌아보거나 무슨 일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아이가 있다. 바로 코순이다. 코에 까만 점이 박혀 있어 코순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고양이다. 내가 어디로 가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졸졸 따라다닌다. 때로는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도 하고, 때로는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하는 듯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 코순이를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코순이가 있어 시골 생활이 외롭지 않구나.’ 말을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지만, 늘 곁을 지켜 주는 작은 생명 하나가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크다.
아직 구들장의 온기가 본격적으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자다 보면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질 것을 기대하며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잤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누린 숙면이었다.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나이가 들수록 깊은 잠을 자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잠을 설치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분명 구들장은 시골집이 내게 주는 커다란 혜택이다.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거스르는 듯하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 주는 아날로그의 선물이다. 장작을 태워 데운 구들장의 온기는 보일러의 온기와는 또 다른 편안함을 준다.
내자와 함께 부지런히 오전을 시작했다. 채소밭을 둘러보고 배추와 무, 갓을 심어 놓은 곳도 다시 살펴보았다. 손볼 곳은 없는지, 겨울을 맞이할 준비는 잘되어 가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렇게 오전 일을 마치고 나니 문득 작년 이맘때의 아쉬움이 떠올랐다. 바로 부귀리의 단풍이었다. 지난해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물안계곡의 아름다운 가을을 놓치고 말았다. 올해만큼은 같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부귀리의 봄 벚꽃은 잘 알고 있지만, 가을 물안계곡의 단풍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그 덕분에 이곳은 더욱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 한가롭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편안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자와 약속했던 물안계곡 단풍놀이를 오늘은 꼭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김주먹밥을 만들고 커피와 물, 사과와 과자도 챙겼다. 거창한 준비는 아니지만 가을 나들이를 떠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니 가을은 한창 익어 가고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은 겨울을 준비하느라 저마다 잎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붉게, 어떤 나무는 노랗게, 또 어떤 나무는 붉음과 노랑 사이의 이름 모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풀들도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씨앗을 퍼뜨리고 내년을 기약하며, 남아 있는 온 힘을 짜내어 마지막 생명의 일을 마무리하는 듯했다. 여름 내내 왕성하던 풀들이 이제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연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갈 준비를 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다.
30여 분을 걸으니 승호대가 나왔다. 기대했던 대로 라이더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달려온 이들에게도 이곳의 가을 풍경은 특별한 선물이었으리라. 내자와 함께 승호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 그것만으로도 망중한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물안계곡으로 향했다. 승호대를 지나면 물안계곡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길은 한가하고 주변 풍경은 평화롭다. 물론 돌아올 때는 지금 내려가는 만큼 힘든 오르막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걱정을 미리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지 아니한가.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물안계곡에 도착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부귀리 배터가 나온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 하나 있다. 소양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길고 아름다운 계곡이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환상적인 물안계곡의 단풍길이 소양댐 건설로 물속에 잠겼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물속에 잠들어 있을까. 그 아름다운 계곡을 품어 버린 소양댐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물만 담고 있다. 사람에게는 아쉬운 사연이지만, 자연은 그 모든 시간을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배터에서 발길을 돌려 물안계곡을 다시 걷다가 바위가 넓게 보이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준비해 온 김주먹밥과 사과, 과자를 꺼내 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고, 단풍 든 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맑은 가을 공기와 따뜻한 햇살까지 곁들여지니 이보다 더 좋은 식탁이 있을까 싶었다. 산해진미가 따로 있을까. 좋은 사람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소박한 음식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맛있고 행복한 식사가 아닐까.
점심을 먹으며 냇가를 바라보니 맑은 물속에 다슬기가 보이고 작은 물고기들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물속의 작은 생명들까지 저마다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단풍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붉고 노란 잎들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맴돌다가 계곡물 위에 내려앉았다. 물 위에 내려앉은 단풍잎들은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마치 자연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가을의 공연을 보는 듯했다. 그 장관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주변을 바라보며 가을을 즐겼다. 물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끼고, 단풍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이런 순간에는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가지고 온 것들을 빠짐없이 챙기고 주변에 남겨진 것은 없는지 살펴본 뒤 귀갓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도 단풍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흔히 가을 단풍을 이야기할 때 빨간 단풍, 노란 단풍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몇 가지 색의 이름일 뿐이다. 자연이 빚어낸 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붉은색 하나에도 수없이 많은 빛깔이 있고, 노란색 하나에도 햇살과 그늘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이 담겨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아직 초록을 간직한 잎들도 있어 더욱 깊고 풍성한 가을의 색을 만들어 낸다. 그 아름다움을 어찌 몇 마디 말과 활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단풍과 물, 나무와 돌, 그리고 풀들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물안계곡의 가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었다. 사람의 손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작품이었다. 봄에는 꽃으로, 여름에는 짙은 녹음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겨울에는 고요한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자연. 그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느낀 하루였다. 작년에 놓쳐 버렸던 부귀리의 가을을 올해는 온전히 만났다. 내자와 함께 걸었고, 함께 쉬었으며, 함께 자연이 내어 준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았다.
물안계곡을 뒤로하고 돌아서며 내년 가을을 기약했다.
가을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오늘 우리가 만난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의 단풍이 더욱 소중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