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풍경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야 할 음악,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전원교향곡과의 만남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정치교육을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 춘천에 세컨드하우스를 마련했다며 한번 놀러 오라고 하셨다. 별생각 없이 찾아간 곳은 춘천 감정리에 자리한 자그마한 시골집이었다. 그날의 풍경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름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방금 쪄낸 옥수수 냄새가 났다. 커피 향이 그 사이로 섞였고, 무더운 날씨 탓에 온몸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이 흘러나왔다.

풀벌레 소리와 찐 옥수수, 커피 향과 여름날의 땀 냄새. 그리고 베토벤. 그 모든 것이 묘하게 한데 어울렸다. 그때 들었던 전원교향곡은 내게 작은 충격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음악 속 풍경 한가운데 내가 들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전원교향곡은 내 클래식 음악 목록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막골에 들어와 살면서도 자주 전원교향곡을 들었다. 산과 나무가 있고, 새가 울고, 계절마다 풀과 꽃이 달라지는 곳에서 듣는 전원교향곡은 도시에서 들을 때와 또 달랐다.


그러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다시 전원교향곡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수없이 들어온 음악인데 오늘은 심장을 깊게 아리게 하는 울림이 왔다.

쿵, 쿵―.

마치 작은 숲 하나가 내 안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나는 ‘전원’으로 돌아간다. 새가 울고, 나무가 흔들리고, 비가 지나간 뒤 흙냄새가 묵직하게 올라오는 곳.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고 이름 모를 풀벌레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곳. 그 속에 있으면 나는 잠시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음악은 ‘바깥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자연’을 깨운다

처음에는 전원교향곡이 자연을 묘사한 음악이기 때문에 숲과 들판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음악이 나를 숲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던 숲을 깨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시에 오래 살다 보면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콘크리트 건물과 자동차 소음 속에서 살다 보면 흙냄새도, 바람 소리도, 밤하늘의 별빛도 조금씩 잊어간다. 하지만 어쩌면 자연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잠시 잠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음악 한 곡이,
어떤 냄새 하나가,
어느 여름날의 오래된 기억 하나가

그 잠든 자연을 다시 깨운다. 내게 오늘 아침 그 열쇠를 쥐고 있던 사람은 베토벤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동안 아주 오래전 감정리의 작은 시골집이 떠올랐다. 교수님 댁에서 먹었던 찐 옥수수와 커피, 풀벌레 소리와 후텁지근했던 여름 공기까지.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이 음악 한 곡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산들바람 일기를 쓰는 이유도 결국 같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왜 자연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을까. 왜 봉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적고, 마당에 찾아오는 고양이를 사진으로 남기고, 봄마다 피고 지는 꽃들을 기록하고 있을까. 수국이 피었다고 쓰고, 작약의 꽃봉오리가 커진다고 쓰고, 장미가 돌담을 덮었다고 쓰고, 마당의 고양이가 어느 날 찾아왔다고 쓴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아마 그것도 내 안의 자연을 잃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베토벤이 음표로 자신만의 전원을 남겼다면, 나는 글과 사진으로 나의 전원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어쩌면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릴 풍경 하나를 붙잡아 두는 일. 오늘의 바람과 냄새와 햇살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 그날의 나까지 함께 되살아나는 일.


오늘의 숨 – 마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차는 출근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산과 들이 흘러갔다. 나는 분명 직장으로 가고 있었지만 음악을 듣는 동안 마음은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래전 감정리의 여름날에도 갔다가,
삼막골의 아침에도 갔다가,
봉화산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도 머물렀다.

음악은 쿵쿵 뛰던 심장을 조금 가라앉혔지만, 대신 마음의 문 하나를 더 깊이 열어 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전원’은 어느 특별한 장소의 이름이 아니었다.

감정리도 아니고,
삼막골만도 아니었다.

내가 자연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순간, 바람 소리를 듣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곳이 바로 나의 전원이었다. 그리고 그 전원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오늘 아침 베토벤은 그 문을 잠시 열어 주었다. 그래서 출근길 차 안에서 나는 잠깐, 내 마음의 고향에 다녀왔다. 음악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전원의 마지막 울림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아마 오늘 하루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될 것 같다. 내 안의 숲이 아직 깨어 있으니……………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음악

글을 읽으셨다면 잠시 눈을 감고 베토벤의 ‘전원’을 함께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내가 감정리의 작은 시골집에서 처음 만났고,
삼막골에서 수없이 다시 만났던 음악.

베토벤 교향곡 제6번 F장조 Op.68 ‘전원(Pastoral)’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David Robertson 지휘

▶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