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을 위한 준비 — 작약과 목단 씨앗을 받다

작약과 목단이 꽃을 피우고 진 자리에 씨를 맺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뜨거운 햇살과 살인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이어진 무더위 속에서도 작약과 목단은 묵묵히 씨앗을 키웠다.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씨방은 점점 통통해졌고, 그 안에서는 내년을 준비하는 씨앗들이 여물어 갔다.

아무리 뜨거운 여름이라도 씨앗이 익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처제 부부는 일요일 저녁에 시골집에 들어와 수요일까지 쉬었다 가곤 한다. 이번에는 우리 부부도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되었다. 팔월의 마지막 날, 하루 휴가를 내고 시골에서 쉬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문득 처제가 보이지 않아 뒤란으로 나가 보았다. 처제는 소쿠리를 앞에 놓고 저번 주에 수확한 작약 씨앗을 씨방에서 하나씩 분리하고 있었다. 나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씨앗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잘 익은 씨방은 이미 자연스럽게 벌어져 씨앗이 쉽게 떨어졌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씨방은 손으로 벌리거나 도구를 이용해 씨앗을 꺼냈다.

그런데 처제가 씨앗을 담아놓은 소쿠리를 보니 자그마한 돌과 흙이 씨앗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다. “씨앗에 왜 돌이 이렇게 많이 섞였어?” 물었더니 씨방을 자를 때 이미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많아 그것들을 긁어모으다 보니 흙과 작은 돌까지 함께 담겼다고 했다. 내가 분리한 소쿠리에는 씨방에서 바로 꺼낸 씨앗만 있어서 비교적 깨끗했다.

그런데 옆에 따로 담겨 있던 씨앗은 유난히 크기가 컸다. 처음에는 작약 씨앗이 유난히 잘 여문 것인가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달랐다. 목단 씨앗이었다. 작약 씨앗과 나란히 놓고 보니 차이가 확실했다. 목단 씨앗은 작약 씨앗보다 두 배 가까이 커 보였고 씨앗 표면의 윤기도 조금 달랐다. 매년 꽃을 보면서도 씨앗을 이렇게 한자리에 놓고 자세히 비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씨앗 분리를 마친 뒤에는 소쿠리에 섞여 있던 작은 돌을 골라내고 씨방에서 떨어진 껍질과 잎도 하나하나 주워냈다. 그렇게 정리한 씨앗은 며칠 더 말리기 위해 방 안에 들여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씨앗을 뿌릴 자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아직 밭이 정리되지 않아 바로 파종할 수는 없다. 잘 말린 씨앗은 잠시 보관해 두었다가 밭을 정리한 뒤 흙 속에 심어볼 생각이다.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그 위에는 낙엽을 덮어줄 것이다. 겨울 눈도 맞고, 비도 맞고, 산골의 매서운 추위도 견디면서 씨앗 스스로 봄을 준비하도록 말이다.

작약과 목단은 씨앗을 심었다고 곧바로 내가 원하는 때에 싹을 보여주는 식물은 아니다. 어떤 씨앗은 봄에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어떤 씨앗은 한 계절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다려 볼 생각이다. 생각해 보면 씨앗을 받는 일은 올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내년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봄에 화려하게 피었던 꽃이 지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 씨앗을 남겼다. 그리고 그 씨앗을 받아 다시 흙에 돌려준다.

꽃에서 씨앗으로, 씨앗에서 다시 꽃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어쩌면 그 사이에서 조금 거들어주는 것뿐인지도 모르겠다. 올가을 작약과 목단 씨앗을 흙 속에 묻어놓고 낙엽을 덮어주고는 자연의 섭리에 맡겨볼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 따뜻한 햇살 아래 흙을 밀어 올리며 올라오는 작은 새싹 하나를 발견한다면, 아마 오늘 처제와 나란히 앉아 씨앗을 고르던 비 오는 여름날이 다시 생각날 것 같다. 그 작은 씨앗 속에 벌써 다음 계절이 들어 있다.

내년을 위한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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