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과 함께하며 배운 ‘제철의 행복’

봄바람과 함께 깨어난 정원

겨우내 긴 잠에 빠져 있던 정원이 봄바람과 함께 하나둘 깨어납니다.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정원은 어느새 저마다의 목소리로 봄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2년전에 새로 심은 꽃잔디는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정원의 전령입니다. 보라색과 흰색의 작은 꽃들이 땅을 덮으면 겨울의 흔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원은 화사한 봄빛으로 물듭니다.

길거리에서 캐다 심은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샤스타데이지는 노란 속살을 하얀 꽃잎이 둘러싼 모습이 마치 작은 계란처럼 보입니다. 소박하면서도 눈부신 화사함이 있어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환해집니다.

몇년전에 꽃씨를 뿌린 꽃양귀비는 여리여리한 몸짓으로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내가 바로 봄이야!” 하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원의 품격을 담당하는 작약과 목단이 있습니다.

곁작약

조심스럽고 고운 자태를 가진 작약과, 대담하고 화려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목단.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두 꽃은 매년 누가 정원의 주인공인지 우아한 경합을 벌이는 듯합니다. 작약과 목단은 해마다 씨를 받아 세력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벤더와 로즈마리는 화려한 꽃들처럼 앞에 나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친구처럼 은은한 향기로 정원의 평온을 책임지는 든든한 조연입니다. 겨울이면 실내에 들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4-5년 꾸준히 심고 가꾼 연산홍은 집 주변을 분홍과 흰색, 빨간색으로 가득 채우며 봄의 절정을 만들어 줍니다. 산에서 캐다 심은 철쭉은 연산홍의 화려함에는 조금 못 미치는 듯 보이지만, 은은한 분홍빛으로 피어나는 모습은 오히려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철쭉

그리고 제가 특히 좋아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미스김 라일락입니다. 처제가 2년전에 원주에서 묘목을 사다주어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맺힐 때는 진한 보랏빛을 띠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연보라색으로 변하고, 만개할 무렵에는 하얀빛을 머금습니다. 무엇보다 가까이 다가가면 매혹적인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라일락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스김 라일락이 더 좋습니다.


여름, 에너지 폭발의 천연색 축제

여름 정원은 그야말로 ‘흥부자’들의 무대​입니다. 초록 잎 사이로 원색의 꽃들이 피어나면서 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더합니다. 해마다 꽃씨를 뿌리는 백일홍, 정원을 꾸미기 전부터 피어있던 금계국, 길가에서 옮겨심은 루드베키아​는 여름 정원을 대표하는 분위기 메이커입니다. 백일홍은 오랫동안 꽃을 피우며 자리를 지키고, 금계국과 루드베키아는 노란빛으로 마당을 환하게 물들입니다.

스스로 꽃씨를 떨어뜨려 해마다 피는 메리골드는 예쁜 외모 뒤에 의외의 매력을 가진 꽃입니다. 특유의 향으로 해충을 막아주는 역할도 해주니, 곁에 심어둔 고추와 상추까지 지켜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수국과 목수국은 물을 좋아하는 꽃들입니다. 삽목과 입양으로 정원에 위치한 수국은 화려함과 수줍음을 동시에 가진 꽃입니다. 반면 목수국은 처음에는 꼿꼿하게 꽃송이를 세우고 있다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무거운 꽃송이를 살며시 숙입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과 닮았습니다.

마을의 이장님이 주신 불두화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꽃을 피웁니다. 둥글둥글하게 모인 하얀 꽃송이가 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부처님오신날 무렵이면 하얀 꽃이 피어 정원을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을과 겨울, 깊어지는 마음과 조용한 휴식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정원도 비로소 차분해집니다. 봄과 여름의 화려함을 내려놓고 이제는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준비합니다. 꽃씨를 뿌려 세력을 늘린 구절초, 해마다 시장에서 구입해서 조금씩 세력을 늘린 국화가 피어나는 가을은 정원의 또 다른 절정입니다. 하얀 안개처럼 피어난 구절초와 가을의 깊이를 담은 국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정원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쉬어가도 괜찮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국화 향기를 맡으며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 어쩌면 이것이 정원이 사람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사리 뜯는 곳에서 옮겨심은 벌개미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한국 특산 식물로, 연한 보랏빛 꽃이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화려하게 앞에 나서기보다는 뒷정원을 지키는 든든한 지킴이 같은 꽃입니다.

겨울이 오면 정원에는 꽃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눈 덮인 정원은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산홍은 가지를 움츠리고, 흙은 낙엽이라는 따뜻한 이불을 덮은 채 다음 봄을 준비합니다. 꽃이 없기에 오히려 정원의 뼈대가 선명하게 보이는 계절. 그래서 저는 겨울 정원도 사랑합니다.


모든 것은 제 시간에 피어난다

꽃을 키우면서 깨달은 가장 큰 진리는 어쩌면 사람도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봄이 오자마자 꽃을 피우지만, 어떤 꽃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조심스럽게 꽃망울을 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빠르게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자신의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보다 늦게 피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꽃에는 꽃마다 피어나는 계절이 있고, 사람에게도 사람마다 자신의 시간이 있습니다.

정원은 오늘도 조용히 제게 속삭입니다.

“서두르지 마라. 모든 것은 제 시간에 피어난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이 말을 기억하며 정원을 가꾸게 될 것 같습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람을 기다리고, 나 자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산들바람이 정원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다음 계절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