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계절이 바뀌는 시간
여름은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비가 한두 번만 내려도 며칠 사이 정원의 풍경이 달라질 만큼 풀이 무섭게 자란다. 다음 주에는 시골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아 토요일 아침과 저녁 시간을 나누어 예초 작업을 하기로 했다. 집 주변과 형님댁 둔덕을 둘러보니 어느새 풀들이 제법 자라 있었다.
전원생활을 오래 즐기려면 풀과 타협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풀을 모두 없애겠다는 욕심을 내면 사람만 지치고, 그대로 두면 금세 자연이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어느 정도는 자라도록 두었다가 손이 닿을 만큼 되었을 때 다시 정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전원생활의 지혜다.
칡은 생명력이 강한 것도 문제지만, 예초 작업을 할 때 예초기 날과 와이어에 엉겨 붙어 작업을 더디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것은, 칡이 있는 곳에서는 처음부터 쇠날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점이다. 작업 시간도 훨씬 줄어들고, 예초기가 무리하지 않아 보다 안전하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
형님댁 주변의 풀과 칡을 제거한 후에, 집 주변 예초 작업을 마쳤다. 다음 주의 풀자람이 걱정 되어서 개울가의 풀까지 시간을 내어 베고, 뒤곁 도로 주변도 말끔하게 손을 보았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역시 예초 작업은 기계의 컨디션에 따라 능률 차이가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번에는 예초기를 제대로 정비해 둔 덕분에 쇠날은 쇠날대로, 와이어는 와이어대로 제 역할을 해주었다. 내가 원하는 작업이 막힘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기계도 사람처럼 평소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예초 작업을 하는 동안 내자는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원을 환하게 밝혀주던 꽃양귀비와 끈끈이대나물은 화려한 시간을 내려놓고 이제는 조용히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온다. 화려함의 끝이 반드시 슬픔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꽃은 씨앗을 남기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사람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우리 인생도 화양연화의 젊음이 지나면 저 꽃들과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화려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조금은 느려지지만, 그만큼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꽃양귀비와 끈끈이대나물은 뽑아내어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남아 있는 씨앗들이 자연스럽게 땅으로 떨어져 내년 봄 다시 꽃 피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는 그 자리에 가을을 위한 메리골드를 옮겨 심을 예정이다. 이 메리골드는 지난해 떨어진 씨앗에서 스스로 싹을 틔운 아이들이다.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 더욱 정이 간다.
정원 정리를 마친 뒤에는 주변의 금계국과 샤스타 데이지를 밑동 가까이까지 과감하게 잘라주었다. 이렇게 해주면 가을에 다시 한 번 힘찬 꽃을 피워 정원을 환하게 밝혀준다. 국화는 보이는 대로 순지르기를 해주었고, 꽃잔디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꽃잔디를 보식했다.
시골 생활을 하며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꽃을 무조건 크게 키우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아이가 키를 키우기 시작하면 다른 꽃들도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듯 위로만 자라게 된다. 그러다 결국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순을 치고 줄기를 정리해 주면 키는 조금 낮아도 줄기는 훨씬 굵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길러진 꽃은 바람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오랫동안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높이만 바라보며 살아가기보다 때로는 욕심을 덜어내고 내실을 다질 때 더 오래, 더 아름답게 자신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정원에는 루드베키아와 수국, 백합, 채송화가 꽃양귀비와 끈끈이대나물이 남기고 간 자리를 채우며 또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있다. 꽃은 지지만 정원은 비어 있지 않다. 하나의 꽃이 물러나면 또 다른 꽃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계절이 이어지듯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오늘도 정원을 가꾸는 일은 결국 내 삶을 가꾸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