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호대

가을바람에 풀도 쉬어가고, 우리도 쉬어간다

마지막 풀 정리

무더위와 경쟁이라도 하듯 자라던 집 주변과 형님댁 둔덕의 풀들이 가을바람과 더불어 성장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여름비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원망이라도 해야 할 만큼 쑥쑥 자라던 풀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가을바람에 고개를 숙이며 최소한의 성장만 이어가는 듯하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풀들이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다.

올해 마지막으로 집 주변과 형님댁 둔덕의 풀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초기의 윤활유를 교환하고 연료를 가득 채웠다. 풀을 깎을 때 꼭 필요한 와이어도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준비를 마치고 시동을 걸어보니 예초기가 경쾌한 소리로 응답한다.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형님댁 둔덕부터 예초작업을 시작했다.

이곳은 해마다 칡 때문에 애를 먹던 곳이다. 칡덩굴이 자꾸 위로 올라오고 예초기에 감겨 작업을 방해하곤 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된 둔덕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칡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환삼덩굴이었다. 환삼덩굴은 집 주변에서도 가끔 발견되어 제거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군락을 이루어 칡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칡을 이길 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약을 사용해서라도 칡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환삼덩굴이 칡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꿩 잡는 것은 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물론 환삼덩굴 역시 번식력이 강하고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할 수 있는 풀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눈앞의 둔덕에서는 칡의 기세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환삼덩굴을 이용하면 칡의 세력 확장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예초작업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지난 10년 동안 풀을 관리하면서 풀의 자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풀들이었는데, 오늘은 그 풀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새롭게 느꼈다.

형님댁 둔덕의 예초작업을 마치고 집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이라 그런지 풀들의 자람이 여름만큼 왕성하지 않았다. 이전에 풀을 제거하면서 미처 손대지 못했던 곳을 중심으로 찬찬히 정리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낸 나무들이 예초기의 와이어에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작업했다.

보도블록 사이로 자란 풀들은 와이어를 조금 길게 빼서 최대한 짧게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블로어를 이용해 잘린 풀과 흙먼지를 깨끗하게 정리하니 주변이 한결 말끔해졌다. 올해 마지막 예초작업을 마쳤다는 생각에 마음까지 개운해졌다.

가을길을 따라 승호대로

예초작업을 마친 뒤 아침을 먹고 커피와 찐빵을 챙겼다. 오랜만에 운동도 할 겸 내자와 함께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목적지는 삼막골에서 작품활동을 하셨던 우안 최영식 선생님이 이름 붙이셨다는 ‘승호대’다. 승호대는 소양호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작가들과 라이더들도 즐겨 찾는 명소다.

내자와 함께 걷는 길은 언제나 정겹고 좋다. 길가에 피어 있는 쑥부쟁이는 집에서 자라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고고해 보였다. 가끔씩 만나는 들국화도 그 정결한 모습과 들판의 향기를 선물한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의 향기가 실려 왔다. 풀숲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는 어찌나 크고 끊임없는지, 순간 내 이명이 심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감각의 호사다.

눈에는 가을꽃이 들어오고, 코끝에는 숲의 향기가 머물고, 귓가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밤나무 아래에 이르게 된다. 작은 토종밤들이 길 위에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벌레 먹은 밤을 골라내고 성한 밤들을 주워 가져온 가방에 넣거나 호주머니에 담았다.

“오늘 저녁에는 불을 때서 군밤을 만들어 줄게.” 내자에게 기분 좋은 약속도 해본다. 가끔씩 큼직한 밤을 발견하면 왠지 그 크기만큼 기분도 좋아진다. 작은 밤도 밤이고 큰 밤도 밤인데,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하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간을 쫓아가지도 않는 가을 산책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승호대에 도착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승호대의 드립커피

승호대에는 오토바이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소양호의 풍경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라이더들인 모양이다. 방문객은 방문객대로, 우리는 우리대로의 시각으로 승호대의 풍경을 마음껏 바라보고 느꼈다. 집에서 챙겨온 커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스타벅스의 커피가 부럽지 않다. 세상에 하나뿐인 승호대의 드립커피다.

조금 출출해진 참에 찐빵도 꺼내 함께 먹으니 금상첨화다. ‘세상에, 이런 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산이다. 그리고 눈앞에는 바라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소양호가 펼쳐져 있다. 계절에 따라, 햇빛에 따라, 바람에 따라 호수의 모습은 달라진다. 같은 자리에 앉아 바라 보아도 매번 새로운 풍경을 선물한다.

굳이 무슨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자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찐빵을 먹고, 산과 호수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막골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아침에는 풀을 깎으며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고, 산책길에서는 가을이 건네는 소소한 선물을 받았다. 여름 내내 무섭게 자라던 풀들도 이제는 성장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 사람도 때로는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오늘 승호대에서 마신 커피 한 잔과 내자와 나누어 먹은 찐빵 하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